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석굴암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 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석굴암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까지는 석굴암의 슬픈역사가 있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은 일본인 우편사가 우연히 발견한 뒤에 대대적으로 일본에 의해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일본은 처음에 석굴암 전체를 배에 실어서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어차피 일본이 지배할 나라인데 가져가서 훼손 시키는 것 보단 여기에

놔두는게 낫다고 판단한 일본은 1912 이후로 수차례 해체·조립·수리를하며 원형을

유지 하였는데 일제시대, 1912~1915년에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에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흙에 파묻혀 있었다.

 

최초의 보수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덮어버렸기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결로현상이 맺히게 되었다.

현재 석굴암은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Posted by 새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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